생각의 흔적

그동안 여러가지로 바쁘고 건강에도 문제가 생겨 서평이나 전시리뷰를 쓸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 결국 티스토리 관리자로부터 휴면기간이 너무 길어서 계정을 없애고 블로그를 폐쇄한다는 경고문을 받아들고 그럴수는 없어서 다시 들어와 본다.

작년 하반기에 글을 올리고는 아직까지 그대로라니...

내가 생각해도 이건 너무했다 싶다.

내가 관리자라도 확(?) 없애고 싶을 것 같다.

글쓰는 공간을 없앨수는 없으니 다시 끈을 이어가보는 의미에서 최근에 본 전시리뷰를 올린다.

 

 

 

 

오늘로 아쉽게 전시가 막을 내렸지만 최근 전시 중 가장 화제가 되었던 국립중앙박물관의 '신안해저선에서 찾아낸 것들'을 보고 생각했던 것들을 소개한다.

신안선은 지금으로부터 40년전 전라남도 신안 앞바다에서 발견된 해저 침몰선으로, 중국 원나라시대인 14세기 전반에 중국 절강성 영파에서 일본 큐슈의 하카다항으로 가다가 좌초한 배다.

우연히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의 그물에 중국 용천요산 청자 1점이 걸리면서 약 10년에 걸쳐 대대적인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배를 비롯하여 중국자기, 자단목, 동전 등등 3만점 가까운 유물을 인양했다.

비록 중국에서 고려로 오는 배는 아니었지만 14세기 전반 동아시아 도자기 교역의 양상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중요한 자료로 취급되어 왔다.

그동안의 전시에서는 일부 유물만 나와서 전체적인 양상을 파악하기 어려워서 아쉬운 점이 많았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작정하고 신안선에 실려 있었던 거의 대부분의 유물이 전시되어 흥미로웠다.

신안선에 실린 자기의 산지별 구성, 그릇 종류별 수량, 기타 품목의 구성과 수량 등을 파악할 수 있어서 전체적인 양상을 파악하기에 더 없이 좋은 전시였다.

개인적으로 나는 도자사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은 도자기가 명품이냐를 보는 것보다 전체 구성과 비율, 그리고 그것이 차지하는 비중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것은 도자기가 생활용품으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전시는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전시였다고 생각한다.

물론 14세기 전반 중국의 도자기를 수입해간 일본에서 어떻게 그것을 인식하고 사용했는지 그 의미에 대해서도 친절히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용도에 대해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중국의 자기 뿐만 아니라 도기도 상당량이 일본으로 수출되었는데, 이것은 주로 일본에서 유행한 차문화로 인해 차를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신안선에는 아주 질이 좋은 고급의 고려청자도 7점  실려 있는데, 이에 관한 해석은 다양하게 이야기되고 있다.

전시와 연계해서 열린 국제학술세미나에서 신안선의 고려청자가 중국에서 고미술품으로 유통되었던 것이 일본으로 수출된 것이라는 관점, 일본인들은 고려청자를 중국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관점 등으로 나뉘어 토론이 있었다.

물량으로 보면 고려청자는 당시의 상황에서 교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동시대 중국과 일본에서 귀한 품목으로 자리한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이 문제는 좀 더 다각도에서 조명할 필요가 있다.

 

신안선에 관한 이번 전시는 그동안 베일에 쌓여 있던 신안선의 전체 모습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매우 깊다.

물론 그것을 준비한 관계자들의 고생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수많은 유물을 수장고에서 꺼내어 정리하고 다시 전시장으로 옮긴 후에 배치하는 과정에서 흘렸을 땀방울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또 앞으로 전시가 끝나면 치뤄질 2차전의 두려움도 전시를 준비한 관계자들을 직접 만나면서 느낄 수 있었다.

모름지기 좋은 전시는 치열한 연구의 결과이고 직접 발로 뛰면서 준비한 관계자들의 수고로움 덕분이다.

이렇게 좋은 전시가 너무 짧게 진행되어 아쉬움을 남기지만 앞으로 신안선에서 더 나아가 당시 동아시아의 문물의 교유와 그것이 가진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불상, 간다라에서 서라벌까지'라는 제목으로 동아시아 고대불교조각대전이 열리고 있다.

석가모니 사후 600년이 지난 시점인 기원후 2세기부터 인도의 마투라와 간다라지방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한 불상들과 인도에서 중국으로 불교가 전해진 후 중국에서 제작한 불상들, 그리고 삼국에 불교가 전래된 후 한반도 각지에서 제작한 불상들이 망라되어 출품되었다. 

인도의 간다라와 마투라는 서로 떨어져 있는 지역이지만 거의 동시기에 불상을 제작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석재와 불상의 특징들이 서로 다르다.

당시 인도 귀족의 모습을 본떠서 만들어진 것으로 각 지역의 색깔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불교가 중국에 전해진 후 중국 각지에서도 다양한 불상이 제작되었는데, 인도 불상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면서도 중국적인 특색이 녹아든 불상들이 제작되었다.

특히 중국에서는 불교가 강력환 황제의 권력을 과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을 통해 불교를 받아들였고 중국과 마찬가지로 왕권을 강화하는 장치로 활용되었다.

고구려와 백제는 직접 중국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불상도 거의 비슷한 형태로 제작되었다.

그래서 고구려와 백제에서 초창기에 제작된 금동불 중 일부는 중국산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삼국은 시간이 지날수록 각국의 특징이 드러나는 불상들을 제작하였다.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금동반가사유상이 바로 삼국시대의 것이다.

 

이번 전시는 국내에서 불교가 발생하고 불상이 처음 제작되기 시작한 인도의 불상들을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전시가 아닌가 한다.

그리고 중국의 여러 지역에서 만들어진 초창기의 불상들이 출품되었는데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의 박물관에서 대여해 왔다.

삼국의 불상들도 금동불과 석불 등 재질을 망라하여 대표작 위주로 전시되어 있다.  

특히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두 점의 금동반가사유상이 독립된 방에 나란히 전시되어 있다.

본래 두 점의 반가사유상은 1점씩 6개월을 주기로 교체전시 중이어서 두 점을 한꺼번에 보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데 이번에 한꺼번에 두 점을 볼 수 있어서 좋은 기회라고 생각된다.

X-ray를 이용하여 금동불을 찍어서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부분들을 설명하고 있는 영상물도 좋았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었던 불상은 경북 봉화 북지리에서 출토된 석조반가사유상이었다.

현재 배 윗부분과 왼쪽 발 일부는 없지만 남아 있는 부분만으로도 무게가 2.6톤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어마아마하다.

만약 다 남아 있었다면 총 높이가 3m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크기에 압도되어 저절로 불심(佛心)이 느껴질 정도였다.

특별히 뛰어난 전시효과가 없더라도 유물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때문에 눈을 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유물 중 그러한 힘이 있는 것이 유명한 국보 금동반가사유상보다는 일부만 남아 있는 북지리 석조반가사유상이었다.

 

이번 전시는 11월 15일까지 약 두달간만 열린다.

유물의 대부분을 외국에서 대여했기 때문에 기간이 짧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하며 사진촬영도 불가능하다.

그 점에 아쉽긴 하지만 쉽게 접할 수 없는 인도와 중국의 불상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귀중한 전시이다.

아마 이런 전시가 다시 기획되기는 앞으로 몇십년간 어렵지 않을까한다.

시간이 되는대로 몇번 더 가서 봐야겠다.

 

 

 

 

블로그를 얼마만에 들어온 것인지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오늘 다시 들어와 살펴보며 그동안 나는 무엇을 했나 되돌아보게 되었다.

한마디로 게을렀다.

그 말이 가장 적당하다.

물론 아무것도 안한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해야만 하는 일만 했었다.

정신차리자!!

 

오랜만에 들어온 김에 글을 하나 쓰고 하야지 하니 최근에 읽었던 책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너무 전공책만 읽었다. 주로 필요에 의해서 말이다.

그래서 어쩔수 없이 가장 최근에 봤던 전시에 대해 올릴수 밖에 없다.

그 전시도 지난달에 본 것이긴 하지만 일단 올려본다.

 

 

다음달 초순에 전시가 끝나는 리움박물관의 <세밀가귀>전을 소개하려고 한다.

세밀가귀(細密可貴)란 고려 12세기 초반에 중국의 사신으로 고려에 왔던 송나라의 서긍이 쓴 <선화봉사고려도경>(흔히 고려도경으로 알려져 있다.)에서 나온 말이다.

송나라 사람인 서긍이 고려에 머물면서 봤던 공예품들 중 나전칠기를 보고 한 말로 '(고려의) 나전의 솜씨는 세밀하고 위하다고 할말하다.'를 의미한다.

고려의 공예기술이 매우 뛰어나고 화려했음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대목이다.

한국의 전통미술에 대해서는 조선시대의 전체적인 분위기인 절제되고 여백이 있으며 담백한 모습으로 대변되어 왔다.

하지만 그 이전인 고대와 고려시대는 화려함을 뽐내는 것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다.

이번 전시는 우리 문화도 절제되고 담백한 것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화려하고 정교한 것들도 많았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기획된 것이다.

크게 문양의 정교함, 손으로 빚어낸 섬세한 형태, 붓으로 이룬 세밀함 세 파트로 나누어져 있다.

유물도 도자기, 나전칠기, 금속공예품, 회화 등 재질을 불문하고 총망라되어 있다. 시기는 고려와 조선시대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삼성에 소속된 박물관답게 첨단기술을 이용하여 전시품의 세부를 아주 디테일하게 볼 수 있게 구성해 놓았다.

전시된 유물은 리움에서 소장하고 있는 대표적인 명품뿐만 아니라 국내의 다른 박물관에서 소장한 명품과 외국에서 빌려온 것들도 있다.

 

전체적으로 소주제별로 전시품의 구성은 괜찮은 편이었다.

특히 문양파트에 있었던 나전칠기들이 인상적이었다.

고려의 나전기술은 수준이 매우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작품은 그리 많지 않고 그나마 대부분 일본에 나가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번에 전시된 나전칠기들은 상태도 좋고 형태나 문양면에서 매우 뛰어난 작품들이었다.

이러한 구성을 위해 큐레이터들이 얼마나 고생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밖에 금속공예품이나 청자를 중심으로 한 도자기도 전시의 전체주제와 소주제별로 잘 어울렸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눈이 호강하는 전시라고 할 만하며 우리의 전통미술도 정교하고 세밀했었다는 것을 당당히 드러냈다는 점에서 권할만 하다.

다만 한가지 아쉬운 것은 회화파트였는데, 불화나 기록화 그리고 사경 같은 것들은 전시주제와 걸맞게 세밀가귀한 것이었지만 조선후기의 여러 회화작품들(예를 들어 정선의 금강산도와 같은)은 주제에서 빗겨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한국의 전통미술의 결정판을 모아놓은 보기 드문 전시였고 앞으로 이런 전시가 언제쯤 다시 열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