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흔적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한창 '조선청화'에 관한 전시가 열리고 있다.

며칠전 지인들과 같이 전시를 보며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청화백자는 조선시대 초기부터 조선말기를 지나 현재까지도 몇백년에 걸쳐 사용된 그릇이다.

하얀 백자에 푸른빛의 청화안료를 사용하여 다양한 무늬를 장식한 청화백자는 중국에서 처음 제작되어 주변국인 한국과 일본을 비롯해 무역을 통해 유럽과 아메리카, 심지어 아프리카까지 전달되어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은 도자기이다.

특히 중국와 일본의 청화백자는 시간차를 두고 전세계를 호령한 대표적인 물질문화이다.

이에 비해 조선청화는 1차적으로 수출용 자기가 아니라 내수용 자기로, 철저히 조선인들의 사용처와 사용방법을 비롯해 미감이 반영된 다분히 '조선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출을 염두에 둔 중국과 일본의 청화백자는 어느 정도 수입국의 선호도가 반영된 반면에 조선청화는 그와는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의 청화백자는 야나기 무네요시가 말한 것처럼 단아하고 절제미가 있으며 여백의 미를 강조해 왔다.

하지만 이번 조선청화전은 이런 기존의 선입견을 깨보고자 매우 노력한 전시로 비춰질 정도로 조선의 청화백자도 이렇게 화려하다라고 뽐내는 듯 했다.

궁궐의 각종 의례에 사용된 대형의 용그림이 그려진 항아리를 전반에 배치하여 크기와 무늬에서 압도적인 스케일을 자랑한다.

중반부에는 문인이 사랑한 청화백자를 통해 조선고유의 단아한 면을 부각하였다면 후반부에는 19세기 이후 다양해진 청화백자의 양상을 많은 유물을 전시함으로써 보여준다.

특히 19세기 이후 청화백자를 전시한 곳에는 벽부장을 이용하여 청화백자의 다양한 종류와 무늬를 시각적으로 구현하였다.

마지막으로 청화백자가 현재의 도예와 회화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현대작가의 작품을 통해 보여준다 

조선청화백자의 다양한 면모, 화려함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에 전시의 목적이 있었다면 어느정도는 성공한 전시라고 본다.

그러나 일면 이렇게 다 끌어모아야만 조선청화도 나름 화려하고 괜찮았구나 하고 느낀다는 사실이 씁쓸하기도 했다.

(중국와 일본 청화백자는 객관적으로 보았을때 그냥  화려하고 품질이 좋은 편이다)

여튼 도자사를 전공하는 사람들은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이번 전시는 조선청화의 새로운 면을 부각한 전시가 아닌가 싶다.

 

조선의 청화백자에서 대해서는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특히 전시를 보면서 잘 모르지만 19세기 일본과의 영향관계, 나아가 유럽과의 영향관계 등을 고려한 연구가 많아져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18세기까지 전혀 등장하지 않았던 기종과 무늬가 급격하게 19세기에 등장하는 이유 등 풀어어할 숙제가 아직 많으니 연구가 좀 더 활발해졌으면 한다.

 

 

 

 

  

 

 

 

 

요새 집근처에 있는 잠실 교보문고에 가면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책이다.

이전부터 소문을 들어 재미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막상 엄두가 나지 않아 읽지 못하고 있다가 최근에 한가해진 틈을 타 보게 되었다.

중간중간 말도 안된다며 말하면서도 피식피식 웃게되는 책이다.

 

스웨덴의 한 요양원에서 100세 생일날 도망친 '알란 칼손'이라는 영감님의 일대기를 그린 내용이다.

학교도 거의 다니지 않은 사람이지만 수많은 우연과 자기 자신의 노력(이 영감님은 전 세계를 돌면서 많은 언어를 살기 위해 익혔다-역시 사람은 먹고 사는 문제에 봉착하면 놀라운 힘이 생기나보다.), 정치를 싫어하는 듯 하지만 기가 막히게 이용하는 능력 등을 앞세워 20세기 세계의 유명한 사람들은 다 만나고 다닌다.

미국의 트루먼대통령, 중국 국민당의 우두머리였던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 소련의 스탈린, 중국의 모택동, 북한의 김일성과 김정일까지 근현대사를 수놓은 걸출한 인물들과 우연찮게 엮이면서 수많은 위기에서 벗어나며 전 세계를 휩쓸고 다닌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알란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느 한 체제의 편을 들거나 싫어하거나 하지 않고 항상 중립을 지킨다는 점이다.

잘 알다시피 20세기는 거의 전 세계가 어느 한쪽 진영에 설것을 요구받았던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알란은 한결같이 그와는 동떨어진 모습을 보이고 그런 정치적인 얘기를 싫어한다고 밝히기까지 한다.

하지만 죽지 않고 갖은 수단과 여러 우연이 맞물리면서 목숨을 부지하며 100세 이후에는 요양원에서 탈출하여 자유를 만끽하게 된다.

정치, 사상과 전혀 연관되지 않고 심지어 그런 것들을 경멸하기까지 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체제와 사상을 만든 사람들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정치와 무관한 듯한 삶을 사는 것 같지만 어느 것 하나 정치와 연관되지 않은 것이 없다.

거의 모든 것이 현실의 정치와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잊고 혹은 잊으려고 노력하면서 사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삶이 정치와 깊이 연관되어 있기에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똑바로 하기를 요구한다.

하지만 그 정치적 힘을 위임받은 대리인들이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하고 있어 그 어느때보다도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기에 이 책의 내용을 그저 웃어넘기지 못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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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논문때문에 여유롭게 전시를 보거나 한가롭게 책을 보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한 이유는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논문제출의 압박에서 잠시 벗어나 책과 전시를 조금은 즐기면서 보고 있다.

물론 이 여유로움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지만...

 

지난 토요일 오후 집에 있기에는 너무 덥기도 하거니와 좋은 전시도 있어서 오랜만에 경복궁에 있는 고궁박물관에 다녀왔다.

아이와 같이 가려고 하였으나 박물관을 싫어하는지라 혼자 다녀오게 되었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조선시대부터 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 조선왕실의 여러 모습을 보여주는 상설전과 함께 종묘전이 열리고 있었다.(아쉽게도 8월 3일자로 종료되었다.)

 

'종묘'전은선왕실에서의 종묘의 성격과 위치, 그리고 그것의 함축하고 있는 의미들을 여러 주제로 나누어 설명한 전시이다.

종묘의 역사와 건축에 관한 것에서부터 종묘 제향과 제기, 제례악과 같은 의례에 관한 내용까지 최근에 본 전시 중 가장 알찬 구성이 아니었나 싶다.

특히 종묘 제향에 사용된 여러 종류의 제기들의 전시가 눈길을 끌었다.

제향을 구성하는 제기가 어떤 종류인지 그리고 어떻게 상을 차렸는지 재현한 부분은 마치 실제로 보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이 전시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종묘의 제기를 보관하던 장소를 그대로 보여준 부분이었다.

제기고라 불리는 이 장소는 종묘에서 치뤄지는 각종 제향에 사용하는 그릇을 보관하던 곳으로 차곡차곡 그릇을 정리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종묘는 유교의 법도와 예의를 지킴으로써 국가와 왕실의 정통성을 드러내고자 했던 조선의 모습을 집약해서 보여주는 좋은 테마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테마라도 그것을 제대로 엮어놓지 못하고 구성이 허술하면 그저그런 전시가 되고 만다.

그러나 이번의 국립고궁박물관 종묘전은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좋은 테마에 적절한 구성이 어우러진 간만에 볼만한 전시가 아니었나 싶다.

적절한 유물 선정과 수량을 조정하여 포인트를 줘야할 곳과 힘을 빼야 할 곳이 적당이 섞여 있어 보는 입장에서 힘들지 않으면서도 요약정리가 되는 것 같았다.

이렇게 전시를 구성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과 노력과 있었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알기에 더 흥미러웠다.